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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의 재발견

qltlzl | 2012.02.28 | 조회 1820

뉴스타파 뭐야 하며 큰소리로 무식이 드럼치던 부장님. 그러면 기분이 나아집니까? 부끄러움을 알아야지.......

http://blog.ohmynews.com/q9447/290061

<뉴스타파>, 혹은 노종면의 재발견

길위에서 2012/02/20 20:58 낮달

▲ <뉴스타파>의 앵커 노종면 기자 ⓒ <뉴스타파> 갈무리


권력 등의 외압 때문에 정상적 언로가 막힐 때 이 ‘말의 길’은 부득이 다른 방식으로 대중에게 이어지는 방법을 찾는다. 제3공화국과 유신, 그리고 5공 시절의 ‘유비(유언비어) 통신’과 ‘카더라 방송’은 그 실증적인 사례다. 그 시절 권력에 의해 ‘유언비어’로 규정되곤 했던 사건은 뒷날 모두 진실로 확인되면서 비로소 역사가 되었다. 

<뉴스타파>, 7, 80년대 유비통신의 '진화' 

사회관계망 서비스(SNS)가 새로운 형태의 1인 미디어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21세기형 언로는 새롭게 진화했다. 우선 왕년의 군부독재 시기의 방식으로 ‘말길’을 막고 시민들의 눈과 귀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또 기사의 행간에 진실을 담으려 애썼던 7, 80년대의 언론인들과는 달리 2012년 벽두의 ‘언론 노동자’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대중과의 소통에 나섰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이 해직 언론인들과 함께 만드는 방송뉴스 <뉴스타파>가 그것이다. 신영복 선생이 쓴 개성만점의 로고에 담긴 의미는 ‘낡은 뉴스의 타파’와 ‘성역 없는 탐사 취재 보도’다. <뉴스타파>는 첫 방송 후 사흘 만에 조회수 25만을 간단히 넘겨 버림으로써 조중동이 수천 억을 들여 시작한 ‘종편’을 능가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진실의 정론에 목마른 대중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일 터이다. 

유튜브(YouTube)에 올리는 동영상 뉴스방송의 형태로 대중에게 전달되는 이 유례없는 방식의 대안언론은 이미 새로운 저널리즘으로 대중과의 소통을 시작했다. “올곧은 언론인들이 장비도 없고 예산도 없는 허름한 곳에서 마치 해적판을 만들 듯이 방송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바로 2012년 대한민국 언론의 현주소”(언론노조 보도자료 중에서, 이하 같음.)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으로 “MB정부의 장악돼 정권에 홍보방송이 돼버린 현실에서 우리만이라도 제대로 된 방송을 통해, 바른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절박함 ”의 진정성을 강화해 주는 것이었다. 

▲ 언론노동조합의 동영사 뉴스 블로그 <뉴스타파>의 초기화면. ⓒ <뉴스타파> 화면 갈무리


<뉴스타파>의 제작진은 이근행(MBC), 노종면(YTN) 등 해직 언론인들이 중심이다. 앵커를 맡은 이는 'YTN의 손석희'로 불리며 메인 앵커로 활약하다 해직된 노종면 기자다. 나는 그를 기자나 앵커보다는 YTN노동조합을 이끈 '훈남 노조위원장'으로 더 분명하게 기억한다. 

뉴스, 혹은 노종면의 재발견 

▲ 노종면 YTN 전 노조위원장

MBC 공채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한 노종면은 YTN으로 옮겨 취재기자와 방송 프로듀서를 거쳤는데 유명 시사 고발 프로그램인 ‘돌발영상’이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는 노조위원장으로 당선될 때까지 YTN의 간판 뉴스인 ‘뉴스 창’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짬짬이 YTN 뉴스를 시청했지만 나는 앵커로서 그를 특별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나는 그만그만한 시간대에 그만그만한 앵커들이 나와서 진행하는 YTN 뉴스가 기존의 공중파 방송의 뉴스와는 다른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노종면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그가 노조위원장(언론노조 YTN 지부장)으로 파업을 주도하여 구속되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부터다. 2009년 6월쯤으로 기억한다. 서울역 앞에서 열린, 전교조를 비롯한 민주노총, 언론노조, 일부 야당 등이 참여한 연대 집회에서였다. 

그때, 노종면 YTN 지부장이 연단에 나와 한 이야기를 나는 꽤 흥미롭게 들었다. 그는 대체로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은 이들이 보여주는 선동적 연설과는 전혀 다른 연설을 했다. 90년대 언론노련 시절, 권영길 위원장의 좀 어눌하면서도 비분강개한 연설에 익숙해진 귀에 그의 차분한 얘기는 쉽게 전달이 됐다. 
MB를 보고 ‘쥐박이’라고 하는 까닭을 알았어요. 어디 가서든 반말을 ‘찍찍’ 해대더라고요…….

기억나는 건 그 정도다. 그는 복장부터 ‘전투적’(?)이지 못했다. 넥타이는 매지 않았지만 와이셔츠에 재킷을 걸치고 있었는데 잘 생긴 외모와는 달리 그는 좀 깐깐해 보였다. 요샛말로 하면 ‘까칠한 도시의 남자’라고 할까. 

그는 이후, 노조의 단체교섭에 해고자인 자신이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자 임기가 남았는데도 사퇴했다. 그리고 3년, 아직도 그는 ‘현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해고 언론인이라면 70년대의 동아·조선 투위의 대선배들이 있긴 하지만 노종면을 비롯한 YTN 기자 여섯 명을 비롯 10여 명의 언론인들은 현 정부 들어 해직된 이들이다. 

‘해직’이라면 동병상련이랄까. 20여 년 전, 5년 가까운 해직시절을 겪은 나는 그것을 심상하게 바라보지 못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언론인이 쫓겨나는 등 언론 상황은 개선되기는커녕 악화일로다. KBS가 넘어가고 MBC도 막장으로 치닫고…. 그러다 결국 지금 MBC는 파업 중이다. 

<뉴스타파>, '애리조나 프로젝트'의 올림판 

노종면 기자는 그간 트위터를 중심으로 기존 매체의 뉴스를 비평하고 주류 언론이 놓친 정보를 전파하는 ‘용가리통뼈뉴스’(@YoToNews)를 운영해 왔다. 그가 용가리통뼈뉴스보다 한 차원 상승된 ‘동영상 뉴스’ <뉴스타파>에 참여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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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노동조합에서 만든 <제대로 뉴스데스크>

회에 걸친 <뉴스타파>를 나는 동영상 파일로 내려 받았다. 가족과 함께 TV에 연결한 대형 화면으로 이 동영상 뉴스를 보면서 나는 뉴스를, 앵커 노종면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었던 것 같다. 흔히들 ‘샤프하다’고 할 때 떠오르는 아무아무 앵커보다 노종면의 눈매와 멘트가 훨씬 날카롭고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청와대를 배경화면으로 삼아 또박또박 공중파가 피해간 현안과 그 진실을 전하는 노종면의 포스는 놀랍다. 그는 기사를 전하면서 거기에 감정을 고스란히 싣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건조하게 기사를 읽어내려 가는 것도 아니다. 특별히 강약을 강조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의 눈매와 표정 때문일까. 

클로징 멘트를 하고도 굳이 공중파의 앵커들처럼 머리 숙여 인사하지 않는 형식도 마음에 든다. 그것은 시청자에 대한 예의의 차원이 아니라, 그가 제도권 밖의 앵커로서 자신이 전하는 보도에 대한 책임과 자부로 읽히기 때문이다. 

1월 30일 방송된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진행자가 ‘나꼼수의 영상판’이라는 의견에 대해 묻자, 노종면은 ‘개인적으로 아리조나 프로젝트’의 영상판‘이라고 판단한다고 대답했다. 마피아 문제를 취재하던 기자가 피살되자 수십 명의 기자들이 모여서 진행한 탐사보도가 바로 아리조나 프로젝트다. 

그는 ‘개인적 의견’이라고 조심스레 말했지만 이미 여러 언론에서 <뉴스타파>를 애리조나 프로젝트의 업그레이드 형식으로 바라보고 있다. 파업 중인 MBC의 언론노동자들이 만들고 있는 <제대로 뉴스데스크>를 포함하여 2012년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 대안언론의 진화는 뜨겁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을 촉발한 억압적 언론 상황을 환기하면서 그러한 언론 상황에 대한 시민대중들의 성찰과 모색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90년대 이후 진전되어 온 이 땅의 언론자유가 현 정부 이래 지속된 ‘역사적 퇴행’으로부터 반등할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애리조나 프로젝트(arizona project) 

                                                                                                              정재권(한겨레 논설위원) 

▲ 폭파된 돈 볼스의 승용차

1976년 6월 2일 낮,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의 호텔 주차장에서 굉음이 울렸다. 호텔을 막 떠나는 승용차 아래서 6개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했다. 운전자인 <애리조나 리퍼블릭>의 탐사 전문기자 돈 볼스는 치명상을 입었고, 열흘 뒤 세상을 떠났다. 숨지기 전 그의 마지막 말은 “결국 마피아에 당했다. 존을 찾아라”였다. 

사고 당일 볼스는 여직원에게 제보자와 점심을 한다는 메모를 남기고 사무실을 나갔다. 애리조나 주 고위 정치인과 마피아가 연루된 부동산 거래의 정보를 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약속 장소인 호텔에 제보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를 기다린 건 다이너마이트 공격이었다. 볼스를 거짓으로 불러낸 존 하비 애덤슨은 얼마 뒤 붙잡혔다. 

▲ 돈 볼스(Don Bolles)

볼스의 테러 소식이 알려지면서 언론사에 전무후무하게 기록된 실험이 시작됐다. 그가 창립에 참여한 미국탐사보도협회(IRE)를 중심으로 미국 전역에서 20여개 언론사의 기자 38명이 피닉스로 몰려들었다. 대개 자비로 휴가를 냈다. 이들은 ‘애리조나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6개월 동안 볼스가 못다 한 취재에 매달렸다. 마피아와 공무원, 정치인, 사법부 등이 얽힌 애리조나의 부패 구조를 파헤치는 것이 목표였다. 

그 결과 23일간 보도될 분량의 기사 40건이 마련됐고, 1977년 3월13일 첫 기사가 <보스턴 글로브> <뉴스데이> 등에 일제히 실렸다. 애리조나 프로젝트는 언론 자유와 언론인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언론인들의 노력이었다. 동시에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한다는 저널리즘 정신의 숭고한 표현이었다. 

  <한겨레>(2012. 2. 9) ‘아침햇발’ 중에서 [기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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