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공정방송이 뭐냐?"
한 마디로 대답하기 힘들다.
그것은 마치 빛이란 뭐냐, 하고 묻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빛은, 한 가지 성질이 아닌 두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다.
요컨대 빛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장이다.
만약 고전역학으로 빛을 해석한다면, 하나의 명약관화한 해석과 정의 등이 가능해지지만,
양자역학 등으로 넘어오면, 빛은 알 수 없는 기이한 속성 덕분에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 힘들어지게 된다.
공정방송은 네모네모가 아니다.
단단한 머리로, 한 가지 정의를 취하려는 안이한 생각은 구태 한 사고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는 어디 있었나?
바로 자기 자신 안에 있었다.
하지만 파랑새를 찾기 위해 바깥을 찾아 헤맨 방황이 없었더라면, 이미 있던 자기 자신 속의 파랑새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펼침막을 보라.
공정방송과 구본홍 퇴진.
낙하산 사장과 구태 사장 등을 반대했던 지난 2008년, 타사를 포함해 한 해 동안 10여명이 해직 당했다.
또 수 십 명이 징계 당했고, YTN은 20여 명의 조합원을 경찰에 고소고발 시켰다.
파랑새가 있을까?
공정방송이 무엇이냐고 묻기 이전에, 촌철 같은 도덕적 제도권 교육의 참말을 받아들이려 하기 이전에, 책상에 앉아 수학 공식과 낱말 등만 외우지 말라.
수학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해 '명제의 정의' 자체가 흔들 린지 100여 년이 지났고, 낱말은 '사랑'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붕괴되어, 50억 명의 50억 가지 '사랑'의 의미가 존재해 왔었기 때문이다.
오만한 구두, 선민의식의 새까만 광택이 얼굴에 번들거릴 때, 고개를 숙여 등 뒤를 둘러보라.
피흘린 동료의 손 아귀 어디에, 공정방송의 깃발이 조용히 흔들거리고 있을 것이다, 게으른 구태, 그래서 광포한 비-앙가주망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