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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호] 울트라마라톤과 4백 개의 사연

마니아 편집팀 | 2012.11.13 | 조회 3476


사람은 확실히 환경의 동물인가 봅니다. 답답한 환경이 계속되다 보니 저도 몸과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터져버릴 듯이 조여오기도 하고, 괜시리 세상 살아가는 모든 일에 짜증이 나기도 납니다. 어떨 때는 이유도 없이 ‘내가 왜 숨 쉬고 밥 먹어야 하나?’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고 우울증이나 그런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아무튼 제 딴에는 뭔가 사고(?)를 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술을 마실 줄 안다면, 담배를 필 줄 안다면, 도박을 할 줄 안다면 아마 거기에라도 빠졌을 겁니다. 그런 재주마저 없었기에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뭔가 시위를 하고 싶었습니다.

지난 여름 우연한 기회에 마라톤을 하는 친한 분에게 이런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 분은 제 삶에 뭔가 자극이 필요할 것 같다면서 울트라마라톤을 뛰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3년 전 노종면을 구속시킨 이 사회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100km를 뛴 적이 있었지만, 그 때 제한시간을 넘겨 정식 완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쉬움이 없지 않았습니다. 겸사겸사 저는 선뜻 그 제안을 받아들여 영동 울트라마라톤에 겁도 없이 참가 신청을 했습니다.

울트라마라톤 [ultra marathon]
정식 마라톤 경기의 풀코스인 42.195㎞보다 긴 거리를 달리는 마라톤.  50㎞의 짧은 마라톤에서 4,700㎞의 최장거리 마라톤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1991년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이 100㎞를 공식대회로 인정했다. [출처: 두산백과] 야간 주행시 주자는 안전을 위해 배낭과 전조등, 후미안전등(일명 깜빡이)을 반드시 착용해야 하며, 이를 착용하지 않을 경우 실격 처리된다. 

선뜻 결정은 했지만 무엇보다 연습량이 부족했습니다. 지난 여름방학 때 교사인 아내와 함께 매일 수락산을 올라간 게 그나마 유일한 운동이었습니다. 2년 전 뇌출혈로 저승 문턱까지 갔다 온 아내를 운동시키기 위해 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제가 아내 덕에 연습을 한 셈이 됐습니다. 울트라 참가 신청을 한 뒤에는 매일 아침 무작정 10km를 뛰었습니다. 주위 분들은 제가 완주할 수 있을까 걱정하셨습니다. 저는 ‘100km를 완주할 수 있는 필승의 전략이 있다’고 큰소리쳤습니다. “처음 50km는 참가비가 아까워서 뛰고, 후반 50km는 그때까지 뛴 게 아까워서 뛴다고...” 그러면서 호기있게 충북 영동 군민운동장의 출발선상에 섰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울트라마라톤이 100km인데 반해 영동 울트라는 1km가 더 긴 101km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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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배번

◆ 출발(0km) ~ 도덕재(38km)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 5백 명에 가까운 주자들이 우루루 뛰어나갑니다. 처음 2km는 영동 읍내를 통과하는 구간입니다. 영동의 자랑거리인 감나무 가로수에는 큼지막한 감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따가는 사람이 없어 나무마다 주렁주렁 매달렸습니다. 영동의 인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그런 영동 주민들이 길 옆에서 큰 소리로 주자들을 응원합니다. 거기에 힘을 얻어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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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출발 직후 (1km 지점)

10km까지는 편하게 달렸습니다. 매일 아침 10km를 달렸고, YTN 동료들과 대회에 출전했을 때도 항상 10km를 달립니다. 저와 함께 달리는 YTN 동료들은 사내 마라톤 동호회인 ‘YTN 달리는 사람들(와달사)’ 회원들입니다. 와달사에는 해직기자가 4명(노종면, 현덕수, 권석재, 조승호)이 소속돼 있지만, 사측은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사에 신고된 와달사 회원 명단에는 해직자들이 빠져 있습니다. 제가 회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와달사 명단에는 회장이 비어 있습니다. 얼마 전 공지된 사내 동호회 회원 명단을 보다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모든 동호회에 회장과 총무가 있는데, 와달사만 회장이 없이 총무만 있었습니다. 저는 5년째 와달사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해직된 이후에 ‘해직자가 회장을 맡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그만두려 했었습니다. 그 때 동료들은 “회사는 인정하지 않아도 우리는 인정한다”며 복직할 때까지 계속 회장을 맡을 것을 주문했습니다. 동료로서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와달사 회원들의 고마운 마음 잊지 않고 있습니다.

15km 지점에 있는 제1체크포인트(CP)에 이르자 어둠이 깔렸습니다. 확실히 시골은 다릅니다. 저녁 6시도 채 안됐는데 사방이 깜깜해졌습니다. CP에서는 진행요원들이 전조등과 후미안전등(일명 깜빡이)를 켜라고 유도합니다. 500밀리 통에 물을 채우고 다시 달려갑니다. 저 앞에 달려가는 주자들의 등에서 빨간 빛들이 깜빡입니다.
 
제가 울트라마라톤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깜빡이' 때문입니다. 깜깜한 밤중에 뛰다 보면 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앞사람의 빨간 깜빡이가 제가 가야 할 길을 알려줍니다. 저 또한 제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제 뒤의 누군가가 제 등의 깜빡이를 보고 길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신영복 선생이 ‘여름 감옥은 옆 사람이 단지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 그 사람을 미워하게 만든다’고 하셨는데, 울트라는 그 반대입니다. 단지 앞사람이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 제가 고마워하고, 저도 단지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울트라의 매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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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출발 2시간40분 후 (죽청교, 19km 지점)

앞사람의 불빛을 보면서 첫 번째 고개인 도덕재를 올라갑니다. 해발 450미터에 불과하지만 오르막 길이가 13km에 이릅니다. 선두권이 아닌, 저처럼 완주를 목표로 하는 주자는 이런 언덕을 뛰어올라가지 못합니다. 걸어서 올라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르막에서 시간을 많이 까먹으면 안되기에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쉬지 않고  걸어 올라갑니다. 이때쯤부터 허벅지와 종아리가 묵직하게 뭉쳐지고 발걸음도 무거워지기 시작합니다.

◆ 도덕재(38km) ~ 도마령(58km) 
거의 3시간에 걸쳐 도덕재 정상에 오르자 이제부터 내리막길입니다. 이런 것을 ‘고진감래’라고 하나요? 내리막길은 단지 땅에서 발만 떼어주면 몸이 저절로 앞으로 나가는 것 같습니다. 인생에 이런 길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이런 달콤함도 잠시... 도덕재가 오프닝이었다면 이제 하이라이트인 도마령(해발 800미터)이 앞에 떡 버티고 있습니다. 도덕재보다 더 긴 15km 구간의 오르막길이 제 앞에 있습니다. 게다가 경사마저 도덕재보다 훨씬 더 가파릅니다.

칼을 든 장수가 말을 타고 넘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도마령’.  2002년 아역배우 유승호가 주연한 영화 ‘집으로’의 무대가 된 곳입니다. 영화 도입부에 유승호가 엄마를 따라 할머니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꾸불꾸불한 길을 달렸던 그 고개입니다. 먼지 풀풀 날렸던 그 비포장 도로가 지금은 포장이 돼 있고, 이제 우리는 그 고갯길을 뛰거나 혹은 걸어서 넘어야 합니다.  

이 정도 오르막이면 걸어 올라간다 해도 평지를 뛰는 것보다 힘이 듭니다. 평지를 달리면 속도감도 느낄 수 있고, 저 멀리 보이는 경치가 어느새 내 옆으로 휙 지나가는 묘한 쾌감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오르막길은 걸어도 걸어도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또 시간을 많이 잡아먹기 때문에 저처럼 제한시간 내 완주가 불투명한 초보 마라토너들은 마음이 더욱 초조해지기만 합니다. 

이런 상황을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은 ‘생각’입니다. 일부러라도 많은 생각을 하려고 애썼습니다. 생각이 복잡할수록 몸의 고통이 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백수 아닌 백수로 살아온 지난 4년의 세월, 그 기간에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 앞으로 또 얼마나 이렇게 지내야 할 지 모르는 답답한 상황,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기에 왜 이토록 오랜 시간 이렇게 살아가야 하느냐는 원망까지... 또 내 주변의 고마운 사람들, 그리고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더 힘을 냈고, 미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더 악을 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변 경치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오르막은 빠른 걸음으로 걸었고, 평지와 내리막은 쉬지 않고 뛰었습니다. CP(체크포인트)에 들르면 시간이 아까워 후다닥  먹고 마시고는 바로 다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온갖 생각을 하며 다음 CP까지 뛰는 일에만 집중했습니다.

출발한 지 7시간20분쯤 지나 54km 지점에 있는 5CP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아주 늦게 뛰기 때문에 결승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는 사람을 전혀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5CP에 들어가는 순간 아는 형님 3분이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놀랐고, 그 분들도 놀랐습니다. 저는 “이 분들이 왜 이렇게 늦게 뛰시지?” 하며 놀랐고, 그 분들은 “조승호가 왜 이렇게 빨리 왔지?”하며 놀랐습니다. 허겁지겁 미역국을 마시듯이 먹고 다시 어둠 속으로 뛰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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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출발 7시간20분 후 (5CP, 54km 지점)

그 분들과 함께 출발을 했지만, 곧 속도의 차이로 저는 뒤처졌습니다. 그런데 한참 뛰다 보면 저 앞에서 걸어가는 세 분과 만나게 됐습니다. 조금 있다 또 뛰면 다시 헤어지고, 또 한참 뛰다 보니 또 만나고... 이렇게 만나고 헤어지기를 열 번쯤 거듭하며 91km 지점까지 세 분과 함께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힘이 완전히 빠져 뒤따라가질 못했습니다.

◆ 도마령(58km) ~ 노근리(91km) 
도마령 정상에서는 밤하늘의 별 무리를 꼭 보라고 많은 분들이 얘기하셨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이 대회에 참석할 때마다 도마령 정상에 누워서 5분 정도 별만 본다고 하셨습니다. 마침 올해는 대회날이 그믐이어서 달빛은 없었지만 별빛은 최고로 밝을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그러나 도마령 정상에서 저는 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한시간 16시간 안에 골인해야 했기에 별을 볼 만한 심리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도마령 정상에서부터 15km 가량 내리막길이 계속됐습니다. 오를 때와 정반대로 내리막길은 공짜로 달려가는 느낌입니다. 발만 통통 떼면 몸이 앞으로 쑥쑥 나아갑니다. 그러나 급격한 내리막길은 속도를 줄여야 합니다. 급경사 내리막길을 속도를 내서 달리면 무릎이 바로 나가버리기 때문에 무릎을 굽히고 몸을 뒤로 젖힌 채 중력과 싸우며 내려가야 합니다. 올라올 때도 중력과 싸우며 올라왔건만, 심한 내리막길 역시 중력과 싸우며 내려가야 하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긴 내리막길이 끝나고 이제부턴 지루한 평짓길이 계속됩니다. 오르막이나 내리막은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지루한 평짓길은 심리적으로 힘이 듭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만 같은 평짓길을 지루하게 달리는 것은 보통 고역이 아닙니다. 부침의 과정도 힘들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는 지루한 일상의 반복 또한 견디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인생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울트라마라톤의 좋은 점을 하나 더 생각합니다. 울트라마라톤은 보통의 마라톤대회처럼 거리 표시가 1km마다 있는 것이 아니고, 5km나 10km마다 있습니다. 영동 울트라는 10km마다 거리 표시가 있었습니다. 저같이 소심한 사람은 보통 대회에 나가서 뛸 때면 1km마다 시간을 재면서 일희일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울트라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대범해서가 아니라 거리 표시가 10km마다 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일희일비의 인터벌이 10km로 늘어납니다. 

저는 여기서 인생을 배우려 합니다. 길게 보자.. 길게 보자.. 짧게 보지 말자.. 짧게 보지 말자.. 인생을 1년 단위로 본다면 저는 그동안 4번의 좌절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나 10년 단위로 본다면 저는 아직도 좌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직도 제게는 6년의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울트라를 뛰면서 혼자 읊조립니다. 길게 보자.. 길게 보자.. 

◆ 노근리(91km) ~ 골인지점(101km)
새벽 6시쯤 해가 어슴프레 밝아올 무렵 91km 지점의 노근리 다리 옆을 지납니다. 아직은 어두워서 선명하게 보이지 않지만, ‘이 곳은 노근리 사건 현장입니다’라는 안내 글귀가 길 옆쪽에 보입니다. 괜히 저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겠지만, 왠지 모를 섬뜩함과 아픔이 아련히 전해집니다. “피난시켜 주겠다”는 미군을 믿고 모였다가 기관총 세례를 받고 숨진 2백 명에 가까운 주민들. 분명 잘못된 작전으로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됐건만, AP통신의 보도로 진상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한 마디 사과도, 진상 규명도, 명예 회복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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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노근리 현장 (91km 지점) - 대회측 제공 사진

저희들도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아픔이 있습니다. 저희들에게 기자정신을 가르쳐준 선배들이 정작 위기의 순간에서 침묵했고,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힘을 쥔 불의에 동조하는 모습을 가슴 아프게 지켜봤습니다. 저는 그 선배들이 우리보다 더 앞장서서 불의에 맞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들이 불의라는 것은 알지만, 절대로 저들을 이길 수 없다”는 논리로 불의의 편에 섰습니다. 마치 미당 서정주가 친일 행위에 대해 “일본이 그렇게 빨리 망할 줄 몰랐다”고  변명한 것과 판박이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으냐’였지만, 저들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이기느냐’ 뿐이었습니다.

이제 10km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물리적 거리는 10km이지만, 심리적 거리는 수십km처럼 느껴집니다. 몸의 에너지가 완전히 바닥났습니다. 발이 부어올라 운동화 끈을 풀어줘야 했고, 허벅지와 무릎, 종아리는 수시로 스트레칭을 해서 달래줘야 합니다. 걷는 것조차 힘이 들고 귀찮지만, 90km를 뛰어온 관성으로 뛰다 걷다를 반복합니다.

100km가 멀다 해도 우리가 세상 사는 일에 비유하면 과연 멀다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100km 뒤에는 분명히 골인점이 있고, 내가 90km를 뛰었다면 골인점은 분명 10km 뒤에 있을 테고, 내가 한 발짝 더 뛴 만큼 골인점은 한 발짝 더 가까워짐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세상사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 내가 처한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왔고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도무지 골인점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것이 더 힘이 듭니다. 그래서 세상 사는 일보다 더 쉬운 100km를 뛰게 됐습니다.

몸에 남아있는 마지막 힘 한 방울조차 애써 짜내며 달릴 때 떠오르는 얼굴이 있습니다. 지금의 이 암울한 상황을 만든 사람, 그래서 나로 하여금 101km를 뛰도록 계기를 제공해준  그 사람. 그 사람에게 저도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101km를 달렸고 이제 그 끝이 보이고 있습니다.

원래 YTN 해직사태는 2009년 11월에 해결됐어야 했습니다. 노사가 법원의 결정에 따르기로 합의한 상태에서 2009년 11월 전원 복직 판결이 났습니다. 그러나 사측은 합의를 어기고 항소했습니다. 이 때 사측은 노사가 합의한 법원 결정은 ‘대법원 판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법치국가에서 대법원 판결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이지, 노사가 ‘따르자’ ‘따르지 말자’ 협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게다가 노사 합의 당시 사장이었던 구본홍씨가 언론 인터뷰에서 ‘노사가 합의한 법원 결정은 1심 판결을 의미한다’고까지 밝혔는데도 지금 사장인 배석규 씨는 콧방귀를 끼며 해직 사태 해결을 계속 지연시키고 있습니다.

배석규 씨는 사장 직무대행이 되자마자 보도국장 추천제를 일방적으로 폐지하고, 노사 공정방송위원회 개최를 거부하고, 노조 활동에 적극적인 기자와 앵커들을 지방이나 다른 부서로 보복 발령을 내는 등 전횡을 일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권에서 눈엣가시로 여기며 계속 폐지하라고 압력을 넣어온 돌발영상에 대해서는 PD에게 대기발령을 내려 사실상 무력화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배석규 씨는 이런 일련의 조치들로 인해 불법사찰 보고서에 ‘현 정부에 대한 충성심이 돋보인다’ ‘정식 사장으로 임명해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고, 실제로 보고서 작성 한 달 만에 정식 사장이 됐습니다.

정부에 대한 충성심이 돋보여 언론사 사장으로 임명한다니... 한마디로 기가 찰 일입니다. 개그콘서트의 김영희 씨 버전으로 하면, 정말이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입니다. 충성심으로 언론사 사장이 되는 것은 북한에서나 있을 법한 일입니다. 북한에서는 이른바 당성(노동당에 대한 충성심)이 모든 인사의 기준입니다. 노동신문이나 조선중앙TV 같은 언론사도 당의 통제 아래 있는 만큼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분명 저들은 대한민국을 북한과 똑같이 만드려는 ‘종북주의자’들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저들은 언론의 공정성을 외치는 우리를 향해 ‘좌편향’이라고 매도했습니다. 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YTN은 결코 조선중앙TV가 아닙니다. 저는 조선중앙TV가 아니라 YTN 기자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배석규 씨가 사장 직무대행이 된 직후 임장혁 돌발영상PD에게 대기발령을 내렸을 무렵으로 기억됩니다. 회사 1층 로비에서 노조원들이 농성을 벌일 때  배석규 직무대행이 지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제가 “후배들 목 자르면서까지 사장자리 차지하고 싶으세요?” 라고 절규했었습니다. 그 때 배석규 씨는 참으로 쿨하게 한마디 던졌습니다.

“웃기지 마, 임마”

자신에 의해 목이 잘린 후배의 절규가 그토록 우습게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때 저는 욕을 먹었다는 쪽팔림보다는 ‘귀중한 녹취’를 따냈다는 뿌듯함이 더 컸습니다.

그러나 제 아내는 나중에 인터넷에서 그 동영상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남편이 회사에서 잘린 배경은 이해하고 있었지만 배석규 씨 같은 사람에게 그런 욕까지 얻어먹고 다니는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배석규 씨의 일련의 행태로 전 국민이 비웃고 있습니다.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되자 MBC 김재철 사장과 똑같이 해외 출장을 급조해 도피성 외유를 다니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당신을 구차하게 만드는지요?

정부에 대한 충성심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은 당신의 행동들이 떳떳하지 않습니까?
‘불법사찰의 수혜자’라는 비판에 맞서 ‘나도 피해자’라는 주장을 펼칠 자신이 없습니까?
공정방송을 훼손시킨 당신의 일방적 조치들에 대해 소신있게 얘기하기 겁이 납니까?
불법사찰팀이 그토록 극찬한 당신의 일련의 조치들에 대해 국회의원들 앞에서 그리고 국민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숨어 도망다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증인으로 채택되자 갑자기 해외출장을 떠나고, 그것도 출국한 다음에 그 사실이 확인되는 행태는 세 살 아이가 봐도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지 않나요? 피 같은 회삿돈을 써가며 전 국민을 웃기는 꼼수를 지금 누가 쓰고 있습니까? 저는 당신으로부터 제 한 몸이 쪽팔림을 당했지만, 지금 당신은 YTN 전체가 국민들로부터 쪽팔림을 당하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마지막 10km는 당신에게 꼭 드리고 싶은 선물을 준비했기에 이 악물고 뛰었습니다. 그리고 결승점을 통과하는 순간 그 선물을 펼쳤습니다. 지난 여름 YTN 노조원들이 그토록 서울 시내에서 펼치고 다녔던 그 손팻말을 뒤늦게 충북 영동에서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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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 골인 순간 (101km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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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 골인 직후

5백 명의 마라톤 주자가 뛰고 있으면 그 속에는 5백 개의 사연이 저마다 숨어 있는 법입니다. 제가 쓴 이 후기는 영동 울트라마라톤에서 101km를 뛰게 만든 5백 개 사연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공정방송을 외치는 YTN 노조원 4백 명의 가슴 가슴에는 저마다 공정방송을 포기할 수 없는 4백 개의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공정방송을 해야만 하는 그 사연들이 너무나 절실하기에 온갖 탄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지만, 옳음을 위해서는 결코 물러설 수 없습니다.

오늘도 공정방송에 대한 염원 하나로 온갖 탄압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버텨가고 있는 동료들을 생각하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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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사진 : YTN 조승호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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